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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11월 독립운동가 이설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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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11월 독립운동가 이설 선생 선정
  • 정민국 기자
  • 승인 2015.11.17 0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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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결전론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

▲ 이설 선생 기념비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설(1850년 1월 24일 - 1906년 4월 29일) 선생을 2015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설 선생은 충남 홍성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남당 한원진의 학통을 잇는 이돈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과 교리를 비롯하여 동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정국의 문제점과 방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홍주지역 유생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따라 척사의 대상을 달리하였다. 초기에는 소중화를 지키고 사학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의 이론을 형성하였으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항복조약이라고 통박하면서 척왜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변란에 즈음하여 척왜론은 일본과의 결전을 감행하자는 대일항전론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위정척사론은 의병투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선생은 1894년 갑오변란에 사직하고 낙향한 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매국적을 처단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다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석방된 이후에도 민종식과 안병찬 등에게 의병 봉기를 권하는 등 항일투쟁에 매진하였으나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은 척왜론과 대일결전론을 실천에 옮긴 관료이자 현실비판적인 유학자였다. 동시에 민족적 위기에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 민족운동가였다. 이에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국권회복에 헌신한 선생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11. 16.(월) 충남대학교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11월 한 달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기획사진전을 개최할 계획이다.

/정민국기자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신문/호남타임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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