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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근 편집인<교육학박사> “쓴 소리 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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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근 편집인<교육학박사> “쓴 소리 할 수 있는 용기”
  • 호남타임즈
  • 승인 2017.06.1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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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편집인
‘왜 이렇게 되었지?’, ‘요사이는 情이 없어졌어.’ , ‘삶이 각박해.’ 등등의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도 ‘왜 이렇게 느끼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대처에 깊이 있는 논의가 미진한 것은 현상에 대한 전제 없는 토론 문화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성적은 상위를 차지하면서도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이율배반은 몸짱만 소중하게 여기고, 정신 가꾸기에는 소홀한 어른들의 껍질문화에서 배우고 가꾸어진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아닐까?

나도 ‘아이들이 왜 저리지?’,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 ‘아이들의 말이 왜 퉁명스럽지?’ 등의 생각을 적지 않게 하게 된다. ‘나에게 무슨 서운함이 있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의 말과 행동에 잘못이 있지 않나?’ 하는 暫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시간에는 조금이나마 사회가 이렇게 망가져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나만의 다짐이랄까? 또한 이러한 현상의 저변에는 어떤 因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특히 ‘어른들이 걱정하는 아이들의 실제 모습은 무엇으로부터 잉태되었을까?’ 하는 철학적 반성으로 방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너 혼자 나라를 걱정한다고 무엇 하나 바꾸어지겠느냐?’고 하는 빈정거림도 많이 받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나라와 후손들의 걱정에 잠 못 이룰 것이다. 한 나라의 미래는 그 나라의 청소년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국가발전의 대계는 교육에 있다.’는 믿음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사회의 인생관·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은 모두가 우리 어른들의 가치관·인생관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부여한 삶의 태도를 보고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은 또한 적반하장이 아니겠는가?

옛날 교육은 일상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배우고 실천의 점검을 어른들이 시시때때로 한 최고의 교육학 이론 실천의 장이었던 것이다. 요즈음과 같은 觀念的인 교육이 아니라 工夫의 목적인 삶의 기술을 日常에서 익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배움과 삶의 괴리에서의 人性敎育은 空虛하고 反響없는 메아리며, 卓上敎育의 極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官公署 등의 廳舍 앞을 지나다 보면 ‘正義로운 사회건설’ 등의 좋은 문구들을 접하면서 錯雜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그 문구를 자신들의 廳舍 內에 부착하여 다짐을 하고 또 지켜지는 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개선해 가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의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의 변화를 선도하는 어른들의 참모습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인격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格’은 기준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은 사람다운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으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敎育도 人格이 갖추어진 사람에 의해서 행해질 때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는 사회 모든 곳에서 사람다움을 가르치는 ‘人間學’ 같은 교육과정의 도입이 절실하고 시급하다 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었지?’ 하고 묻고 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씀도 본받지만 하는 모습을 따라한다는 이야기는 ‘高麗葬 이야기’에서부터 지금까지 교육의 산 證據가 되고 있지 않은가?

학자들은 아이들이 특히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엄마의 人性이 아이들의 人性’이 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대학 교육도 강조하고 투자를 많이 하지만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그 실천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유치원보다는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육에 치중하고, 더 나아가 후생복지 등도 上部로 갈수록 후한 정책을 취하고 있는 편은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하급교육 기관의 근무자들은 자긍심과 책무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惡循環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暗鬱하기만 하다.

교육학자인 Dr. James Dobson은 “아이에게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는데, 인간은 교육적 존재이기 때문에 교육에 의해 바르게 되며, 여기에는 적당한 계율과 훈육이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적절한 절제와 지도, 당근과 채찍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특히 아이 때는 노대고 사춘기 때에는 반항하기 때문에 강하지만 따뜻한 울타리가 필요한 것이다. 강하지만 따뜻한 울타리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어른들의 지혜, 즉, 聖人的 방황과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잔소리를 하고, 미워도 참고 기다려야 하는 모순 말이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제한하는 울타리는 더 성숙한 인격을 갖춘 사회인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사다리인 것이다.

이 점에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의 자녀교육은 유명하다. 그는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첫째 졸라댈 때, 특히 울며 요구할 때는 주지 않고, 아이의 요구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만 준다. 그것도 예의 바르게 요구할 때에만 준다는 것이다. 둘째 잘못한 일에 대해 솔직히 고백했을 때만 용서를 하고, 거짓말했을 때에는 용서하지 않으며, 셋째는 좋은 행실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칭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모든 만남과 접촉은 갈등이며, 새로운 것은 그 갈등에서 탄생한다.’는 막스 베버의 말은, 갈등을 긍정적으로 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을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울타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들도 힘들지만 울타리를 치는 어른들도 아이들 못지않은 인내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호남타임즈신문 2017년 6월 14일자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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