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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퇴임 후에도 아들, 특히 김홍일 의원 걱정에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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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퇴임 후에도 아들, 특히 김홍일 의원 걱정에 눈물
  • 정진영 기자
  • 승인 2019.04.22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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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의원, 민주화 최일선 활동…김 대통령 인생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지
고문 후유증으로 대통령께도 의사소통 못해 문서 전달해야 했던 아픔 애잔
“돈 받고 의원직 상실해도 좋으니 홍일이 걸어 다니는 &
▲ 목포시 삼학도 김대중노벨평화상 기념관 내 고 김홍일 국회의원 분향소.

민주평화당 박지원 전 대표는 “故 김홍일 의원은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 인생의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다”며 “김 대통령께서 ‘사람들이 나는 대통령이 되어서 성공했다고 하지만 내가 왜 정치를, 대통령을 했느냐, 내 아들들, 특히 홍일이는 뭐가 되었느냐’며 애잔한 심정을 토로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오늘(4월 22일) 아침, CBS-R '김현정의 뉴스쇼', tbs-R '김어준의 뉴스공장', KBS1-R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잇달아 출연해서 “김홍일 의원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확고했고 민주화를 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했다”며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에 김 대통령께서 가택 연금 등 온갖 탄압으로 활동이 제약될 때 김 의원이 아들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하고 만날 수 있어 김 대통령과 모든 것을 상의했고 함께 했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홍일아 미안해, 좀 더 친절하게 해 주지 못해서”라는 SNS를 올린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총재시절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이 되어서도 일요일 점심은 늘 가족들과 함께 하는데 그 때 김 의원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고문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발음이 안 되어 아버지께서 알아듣지 못하고 또 비서실장인 저에게도 알아보라고 하셔도 저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또 평소에도 그러한 일이 있으면 제가 문서로 보내라고 했는데 대통령 아들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신 분으로서 아버지 대통령도 비서실장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본인은 얼마나 속상했겠느냐”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그리고 문서로 그러한 내용을 받고 일부는 제 선에서 대통령께는 보고를 안 드리고 안 된다고 했을 때 본인이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을 것이냐”며 “저는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한 것인데 고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모든 일들이 너무 미안해 그러한 글을 올린 것이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어제 김홍일 의원 빈소에 조문하기 전에 이 여사님을 뵙고 왔는데 ‘저 왔습니다, 박실장입니다’ 했더니, 이 여사님께서 ‘왔어요’ 하시면서 몇 말씀을 나누었다”며 “이 여사께서 7개월 전 떠난 제 아내를 찾으실 경우, 퇴원해서 미국에 딸 출산 때문에 갔다고 말씀드리는 것처럼 고령이시고 병환 중이신 여사님을 위해 김 의원의 작고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일부에서 이 여사님의 건강을 우려하는데 이 여사님께서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한 달 전 입원하셨다”며 “만 97세, 우리 나이로 98세로 워낙 고령이시기 때문에 상태가 좋으실 때는 말씀도 하시지만 좋지 않으시면 말씀을 안 하실 때도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위독하다는 말이 맞을 수 있지만 위독하지 않다는 말도 맞다”고 설명했다.

김홍일 의원 묘역 안장에 대해 박 전 대표는 “5.18 유공자로서 광주 5.18 유공자 묘역에 모시자고 유가족 분들과 협의해서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억울한 나라종금 사건에 의한 보훈처 심의 등 관련 규정에 따른 절차가 있다”며 “오늘 중으로 정리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tbs-R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홍일 의원의 ‘나라종금 사건’을 묻는 질문에 “김 의원이 고향 선배이자 측근인 모 인사가 당시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김 의원에 대해서 ‘돈 3천만 원(당시 1만원 권)이 든 가방을 직접 받아들고 차에 타는 것을 보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서 기소 및 유죄를 받았다”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내 아들이 돈 3천만 원을 받아서 들고서 걸어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매우 억울해 하셨다”고 소개했다.

박 전 대표는 “오죽하면 김 대통령께서 ‘우리 홍일이가 유죄 판결 받고 의원직을 상실해도 좋으니, 돈 3천만 원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원통, 비통해 하셨다”고 말했다.

다음은 고 김홍일 의원의 1980년 고문 당시 회고록 중 일부.

▲ 고 김홍일 의원의 1980년 고문 당시 회고록 중 일부

“끌려온 첫날 수사관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두들겨 팼다. 하루를 한마디 말도 없이 구타만 했다. ‘니가 김대중의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어차피 송장으로 나갈 테니까 피차 힘들게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답해.’ 내 이름은 빨갱이 새끼였다. 연청 사무실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쓴 메모를 간첩이 쓰는 난수표로 인정하라고 했다. 사정없이 구타하지만 급소는 교묘하게 피했다.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쳤다. ‘죽여 달라고? 허허, 이놈이. 여기서는 죽는 게 가장 호강하는 거야. 너 좋으라고 죽여줘?’ 나는 혹여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할까 두려워 수사관 눈을 피해 자살을 기도했다. 책상에 올라가서 머리를 시멘트 바닥으로 처박고 뛰어내렸다. 이때 목을 다쳤다.”

고 김홍일 의원은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얻은 파킨슨병으로 인해 평생을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정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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