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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1>애국지사 강석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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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1>애국지사 강석봉 선생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02.04 10: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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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554호 전경
▲이름 : 강석봉(姜錫奉)

▲생애 : 1890년 9월 23일~1956년 10월 14일

▲출신지 : 전남 목포

▲운동계열 : 국내항일

▲소속 및 지위 : 조선국민회 전나도구역장

▲활동지역 : 평양, 목포

▲훈격 : 애국장(1991)

▲공적내용
전남 목포(木浦)사람이다. 1900년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였다가 귀국하여, 하와이 국민회(國民會)에서 발행하는〈신한국보(新韓國報)〉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장일환(張日煥)서광선(徐光鮮)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해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18년 2월 평양경찰서에 붙잡혀 3월 16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독립의 열망은 식지 않아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에서 동지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박복영(朴福永)양병진(楊炳震) 등과 함께 기독교 중심의 시위계획을 세웠다.

1919년 4월 8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청년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선언서경고문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경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으로 남교동(南橋洞) 시장 일대는 피로 물들었으며, 주동 인사들은 속속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일단 피신하여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궐석판결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수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大邱)에서 마침내 일경에게 잡혀, 목포로 압송돼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및 협박죄 등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그는 다시 청년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자료제공 : 목포보훈지청>

<목포타임즈신문 제48호 2013년 2월 5일자 8면>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호남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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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한 2013-12-30 14:16:22
우리 고장에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있다는게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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