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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한 학장 <한국폴리텍대학 목포캠퍼스> 역사속 스토리 인물사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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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한 학장 <한국폴리텍대학 목포캠퍼스> 역사속 스토리 인물사 ‘성삼문’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10.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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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병한 한국폴리텍대학 목포캠퍼스 학장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에 있어서 역사는 조선 최고의 충신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성삼문일 것이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성삼문이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유래이기도 한데, 문헌으로 전하는 내용은 아니고 구전 설화에 가깝다.

성삼문은 21살 때에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453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어린 단종은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의 위협에 못 이겨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사실을 누설하여 발각되고 말았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죽으러 나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성삼문은 흔히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되곤 한다. 정몽주는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 한편을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성삼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성삼문은 2백년이 지난 뒤인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사육신의 무덤이 수축되고 묘지 위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삭탈된 관직이 회복되었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 시호가 주어졌다.

 

<목포타임즈신문 제74호 2013년 10월 23일자 7면>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호남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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