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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환 공학박사<한국폴리텍대학 목포캠퍼스 조선설계과 교수>"따뜻한 情感! Give and take가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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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환 공학박사<한국폴리텍대학 목포캠퍼스 조선설계과 교수>"따뜻한 情感! Give and take가 사라지고 있다"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12.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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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정환 공학박사
어느 서양 철인은 “人間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本來의 뜻은 아마 혼자서는 이 세상에서 生活하기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他人과의 유대관계 속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相通되는 점을 조정하고 타협하여 부족한 점들은 보완하면서 나름대로 주어진 生을 보람 있게 꾸려가고자 함에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 본다.

他人과의 연계 속에 살면서 흔히 말하는 ‘Give and take’를 상정해 본다면 이는 사랑의 유형 중에서 에로스(Eros)적 사랑을 연상할 수 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과 얼마 되지 않은 物質에 눈이 먼 장님이 되고, 한두 잔의 술에 自己忘却 증세를 일으키거나 흉악한 흉기로 위협하여 돈과 물질을 모두 所有하게 되었을 때나 우연한 기회로 億萬金을 손에 쥐어졌다고 진정 삶이 두려워서 社會를 만든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가로 지불될 수 있는 ‘Give and take’ 인지에 대한 흑백의 논리에는 주장이나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을 것이다.

東洋哲學의 견지에서 순자의 性惡說이나 맹자의 性善說은 우리네 사람이 원래는 善하거나 惡하거나를 얘기한 것으로 시작하여 살면서 修養하여 자연에 調和될 수 있는 사람! 또는, ‘순리에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 인진데 우리 人間은 本然의 가치체계의 범위에서 個人의 價値觀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비중을 두는 것이 더 옳지 않은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가 歷史를 인식함에 있어 産業革命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할 때, 産業革命 이후의 역사의 흐름은 가히 소용돌이의 場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人間性이 상실되고, 자연스러움이 사라져가는 사회생활속의 보통 사람으로서 내가 타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주는 마음”과 타인으로 부터 받게 되는 “받는 마음”의 흐름방향이 어떠한 것이 좋은지 생각해 봄직 하겠다.

주는 기쁨 속에서 받는 흐뭇함이 共存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집어 본다면 아마도 自身들의 價値觀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확실한 주체성의 바탕위에 세워진 自我에 대한 가치개념이 정립된 상태에서 주는 이와 받는 이의 마음이 서로 相通되더라도 人間 美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주는 마음속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리라 믿음을 가져본다.

배고픔으로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이든, 타성에 젖어 훔치는 도둑이건 간에 이 樣相君子에게 한 그릇의 따뜻한 밥과 겹겹으로 접어진 人間의 체온이 스며있는 壹萬원 권의 지폐 한 장 이라도 온화한 마음으로 함께 할 때에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을 느낄까? 물론, 이러한 현실은 보기 힘든 가상이겠지만! 이는 한 송이 국화꽃이 피워지는데 기름진 토양과 국화, 그리고 기후조건이 三位一體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人類思想에 처음으로 달에 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은 달에서 “나의 神과 人間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숭배하는 신”과의 사이에는 고도로 發達한 文明의 결정체가 그로 하여금 달의 世界에 있게 하였지만 주고받는 마음을 看過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순탄 하지만은 않은 우리들의 세계에선 소로킨(Sorokin)의 말대로 ‘위기의 時代’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으로 바라본다면 올바른 價値의 정립은 제삼 강조할 必要가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經濟的, 社會的 현상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이 自然의 姿勢에서 眞實된 理性에 바탕을 둔 調和와 均衡이 아니고 일반통행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흑백 논리만으로 승패를 가늠하는 것 같아서 더욱 더 따뜻한 온정이 깃든 주고받는 마음이 더욱 더 그리워진다.

절대라는 用語를 남발하다 보면 어느 한쪽이 무조건적으로 주는 것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는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1795~1878)의 카리스마적 社會에서나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生活 속에서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美德이 생활화 되어 많은 이들이 상대를 위해 베풀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룩한 분노는 죽음보다도 더 무섭다. 가난하지만 풍성한 마음과 人間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하지 말고 주고받는 마음에 사랑의 꽃을 피우자”라고, 나는 내일도 알 수 없는 향수에 젖은 손수건을 만지면서 옛날처럼 옹기종기 모여 흙장난을 하고 있는 순수함이 넘실거리는 어린꼬마 녀석들의 머리에 아낌없는 어루만짐을 주면서 또! 하루를 시작할까 한다.

끝으로 ‘베풀다’란 것은 상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을 뜻하며, 베풀고 난 후에 되돌아오기를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되돌려 받기위해서 잠시 빌려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호남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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