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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2015년 2월, 이수흥(李壽興) 선생 "5척 단신의 청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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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2015년 2월, 이수흥(李壽興) 선생 "5척 단신의 청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 호남타임즈
  • 승인 2015.02.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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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흥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 등을 처단할 목적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신 이수흥(1905년 9월 11일∼1929년 2월 27일)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수흥 선생은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1905년 9월 11일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에서 태어나, 가정문제로 입산하여 3년 동안 승려로 지내던 중 아버지(일영,日瑩)의 간청으로 하산했다가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김좌진(金佐鎭)이 세운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졸업, 무장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수흥 열사는 1923년 7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의군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시작하던 중, 9월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육군 주만참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해 활동했다.

1924년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지방을 시찰하기 위해 경비정을 타고 압록강을 내려오는 것을 기습하기도 했으며, 1926년 5월 육군주만참의부 특무정사로 임명되어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처단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7월 10일, 서울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이후에도 10월 경기도 이천군 현방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했으며, 부친의 부음을 듣고 수원에 가서 장례를 치르고 이천으로 돌아왔다가 11월 6일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27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이수흥 선생은 교수형에 앞서,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어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며 “대한독립만세” 3창을 하여 우리 민족 독립운동가로서의 기개를 널리 보여줬다.

이수흥 선생의 시신은 매부에 의해 수습되어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에 매장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16호에 안장했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이수흥 선생의 고귀한 독립운동 정신을 선양하는 의미에서 1982년 ‘이수흥 기념 사업회’를 결성하여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에 소재한 이천초등학교 앞에 이수흥 선생 동상을 건립, 현재 연안 이씨 종친회와 국제와이즈멘 이천클럽에서 매년 이수흥 선생 추모제를 지내며 선생의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빛나는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목포타임즈신문 제126호 2015년 2월 11일자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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