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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3>애국지사 일강 김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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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보훈청과 함께하는 우리고장 애국지사 / <3>애국지사 일강 김철 선생
  • 호남타임즈
  • 승인 2013.02.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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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지사 일강 김철 선생 기념비
▲이름 : 김철(金澈)
▲생애 : 1886년 10월 15일~1934년 6월 29일
▲출신지 : 전남 함평
▲운동계열 : 임시정부
▲훈격 : 독립장(1962)
▲공적내용
전라남도 함평(咸平) 사람이다.
1917년 상해로 건너가 법률학을 전공하였으며, 1919년 2월 상해 신한청년당 대표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국내에 파견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우 혁(鮮于爀), 서병호(徐丙浩), 현 순(玄楯), 최창식(崔昌植) 등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30여 명과 같이 상해(上海)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에 당선되었고, 동월 제2회 회의에서는 임정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8월 5일 임시정부 교통차장에 임명되었는데 동 총장 문창범(文昌範)이 취임치 않아 총장대리까지 겸직하였다.

국내 조사원이기도 했던 그는 동시에 신한청년당 부주무(副主務)로서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常議員)도 역임하였다.

1920년 1월에 그는 상해에서 김 구(金九), 손정도, 김순애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0년 3월에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그는 동 위원장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는 국내와 해외 동포사회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시책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국내외 동포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물심양면으로의 협조(군자금 등)를 요청하는 일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진력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회계검사원 검사장(國務院會計檢査院檢査長)에 임명되었다. 1925년에는 신한청년당 이사로, 1926년 12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군무장(軍務長)으로, 1931년 10월에는 안창호와 함께 교민단(僑民團) 심판(審判)이 되어 상해교민의 복지향상에 전념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중국인과의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중국항일대동맹(中國抗日大同盟)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34년에는 다시 국무위원에 선임되었고 재무장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에 선출되어 임정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심혈을 경주하였다.
국무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한국독립당의 14명 이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활약한 바도 있었다.

1934년 6월 29일 항주(杭州) 소재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신병으로 서거하여, 이시영조완구송병조양기탁 등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악비묘(岳飛廟) 뒤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제공 : 목포보훈지청>
<밝은 지역사회를 열어가는 목포타임즈/호남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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